
어느 날 예수님은 무덤가에서 살아가던 두 사람을 만난다.
그들은 마귀 들려 사납고 고통받는 사람들이었고, 사람들은 그들과 눈도 마주치기 힘들 정도였다.
사실상 버려진 존재들이었다.
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신다.
그러나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‘치유’보다 ‘돼지’가 더 큰 반향을 일으킨다.
예수님께서 마귀를 돼지 떼로 내쫓자, 돼지들이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고,
결국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“떠나달라”고 말한다.
왜 사람들은 고침받은 사람보다 돼지를 더 걱정했을까?
많은 이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.
왜 마을 사람들은 치유된 두 사람을 기뻐하지 않았을까?
오히려 예수님께 “떠나달라”고 청하는 장면은 당황하게 한다.
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, 이 반응은 낯설지 않다.
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‘가치’보다 ‘손해’를 먼저 계산하는 일에 익숙하니깐.
좋은 사람이 회복되는 것보다, 내 재산의 일부가 줄어드는 것이 더 걱정될 때가 있다.
정의로운 선택보다, 내가 불이익을 입는 게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.
이 장면은 단지 이천 년 전 일이 아니라,
오늘 우리의 사회와 마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.
회복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
이따금 어떤 사람의 변화는 공동체에 불편함을 준다.
늘 약자였던 사람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, 우리는 괜히 “이 사람 왜 변했지?”라고 경계한다.
늘 ‘틀린 사람’이었던 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권리를 말하면,
오히려 그 사람을 멀리하거나 불편해하기도 하다.
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던 질서가 흔들리는 것 같아서이다.
예수님이 보여주신 진짜 변화
하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보신다.
무덤가에서 버려져 있던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으셨다.
‘경제적 손실’보다 ‘사람의 회복’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.
그분은 고장 난 세상을 고치기 위해 오셨고,
그 과정에서 기존 질서가 불편해질 수 있다는 걸 감수하셨다.
우리는 가끔 묻는다.
"왜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반발하지?"
"왜 정의로운 행동이 오히려 외면당하지?"
그 답이 여기에 있다.
익숙한 질서가 깨질 때, 사람들은 회복보다 안정된 손해를 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.
✔ 나는 누군가의 변화와 회복을 기뻐할 수 있는가?
✔ 누군가의 새 출발이 내게 불편하게 느껴질 땐, 그 이유가 무엇일까?
✔ 혹시 나도 예수님께 “떠나달라”고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?
예수님은 여전히 우리 삶에 오셔서 우리 안에 있는 고통과 상처를 만지신다.
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 회복을 기뻐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묻고 계신다.
“내 삶의 중심에 회복이 있는가, 아니면 손익 계산이 있는가?”
이 질문 앞에 오늘 하루, 잠시 마음을 멈춰보면 어떨까?
#삶의묵상 #내면의회복 #손해보다사람 #묵상블로그 #버려진사람들 #일상의치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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